레프 톨스토이 저자 레프 니콜라이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삶의 스승’, ‘철학자’, ‘예술가’, ‘예언자’, ‘설교자’,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순교자’ 등으로 불린다. 그는 1828년 9월 9일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라는 마을의 유서 깊은 백작 가문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톨스토이는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먼 친척인 에르골스카야 부인과 알렉산드라 백작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톨스토이는 고독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인생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톨스토이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다른 과목들에 비해 도덕철학에 대해서는 매우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톨스토이는 프랑스 계몽사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자연주의 사상에 심취한 톨스토이는 대학 강의나 시험 등을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 대학을 자퇴했다. 톨스토이는 열여덟 살 때인 1846년 상속받은 유산으로 이듬해 5월 그는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가 영어와 음악 공부에 열중하는 한편, 농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농지 경영에 힘쓰지만 예로부터 지주를 믿지 않는 농노들의 부정적인 태도와 농사 경영 경험이 부족해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자 다시 낙향을 반복하는 등 톨스토이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자신의 꿈과 이상이 좌절되자 절망과 자기혐오에 빠졌다. 그러다 톨스토이는 스물세 살 때 코카서스 포병 연대의 소위보로 입대했다. 톨스토이는 군 복무 중 자전적 3부작 소설(≪유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썼다. 1853년에 크림 전쟁이 발발하자 톨스토이는 이듬해 ‘세바스토폴 포위전’에 참가해 전쟁의 고통과 생사의 문제에 대해 깊이 인식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1857년 1월 그는 폴란드, 프랑스, 스위스 등을 여행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문명사회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들을 목격하게 된다. 서구 여행에서 돌아온 톨스토이는 학교 건립, 교과서 저술 등을 통해 농민을 교육하고 계몽하는 한편,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톨스토이는 무정부주의와 무저항 정신에 입각한 ‘톨스토이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기독교적 계율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성자의 길을 가려고 노력했다. 그는 종교 활동에 유익한 책을 쓰려는 열망으로 1880년에 ≪참회록≫, 1886년에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 1887년에 ≪인생론≫, 1889년에 중편 ≪크로이체르 소나타≫, 1899년에 장편 ≪부활≫을 발표했다. 1882년 톨스토이는 빈민굴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격분하고, 악을 조장하는 특권계급이나 국가·교회·과학·문명 등에 용감히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그러한 악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고, 금전과 토지 사유를 포기하며, 악의 근원인 국가에 봉사하지 않으며, 사랑과 노동, 자기희생적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생각을 더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민화(民話) ≪바보 이반≫,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있다≫,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 ≪촛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두 노인≫ 등을 발표했다.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쓸 때는 헌신적으로 도와줬던 아내 소피야와는 혐오감으로 각방을 쓸 정도로 부부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리고 1901년 2월 러시아 정교회가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감옥 안의 교회 묘사를 문제 삼아 그를 정식으로 파문했을 때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러시아 혁명운동의 가장 강력한 추진자이자 선구자가 되었다. 가정에서는 가족들로부터 고립되고, 정부로부터는 위험인물로 낙인이 찍힌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1910년 10월 29일 아침에 집을 몰래 빠져나가 방랑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1910년 11월 7일(신력 11월 20일) 톨스토이는 아스타포보 역에서 82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객사했다.